"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렘 1:6)"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이해가 되고 동의가 되시는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까?
그냥 업조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정하시면서 사시나요?
전 때로는 이해안될때가 있습니다. (목사인데도 ㅜ.ㅜ..)
아니 많습니다. 이해 되기 보다 이해 않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그건 그렇게 하시면 않됩니다." 라구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오셨습니다.
"(:5)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고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보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케하는 선지자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럴때 예레미야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전 이 문장이 이렇게 느껴졌습니다.
"잘못 선택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여, 잘못 말씀하셨네요 주님"
'그게 아니라'는 의미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주님 그건 아닌데요' 라고 들렸습니다.
저도 지금 그런 심정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도 했지만 내가 원하는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건 아니지요"라구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나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압니다.
그러나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달라스 윌라스가 쓴 '잊혀진 제자도'를 읽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 책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안식을 실현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되는 세가지 습관 내지 영적 훈련이 있다. 고독과 침묵과 금식이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로 부터 시행해 온 중요한 금욕훈련중에 세가지인데....'
마음이 불편하면 할 수 록 우리는 사람을 붙잡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내 마음이 이러하다, 내가 힘들다, 좀 알아주고 위로해주라...는 의미에서 말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반응을 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문제도 사람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때로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으로부터 답을 얻고 싶어서, 혹은 무언의 동의를 얻고 싶어서 사람에게 자꾸 말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광야가 편한 곳이 아닙니다. 불편합니다. 그러니 모이기만 하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이 그들의 40년동안의 삶이 였습니다.
결국 그 불평하는 말이 모세를 향해 나타났고 그 불평은 결국 하나님께로 향한 의심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 이건 아닙니다. 하나님 잘못생각하셨습니다..."라고
끊임없이 쏟아 내었습니다. 세상에 누구보다 온유한 모세를 짜증나게 한 사건, 그 사건 중심에는 이런 '말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납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잘못보셨습니다. 하나님 이건 아닌데요. 전 어린 아이입니다. 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라고 ...
하나님을 가르칠려고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고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겸손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이 '그렇다'하면 나도 '그렇군요 주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 고 하는 데 '아닌데요 주님' 이라고 말한다면 겸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전 이런 교만이 있습니다. 이 교만을 이기는 방법은 '입을 닫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았습니다. 침묵하는 것입니다. 의심되고 걱정되고 부담이 되면 그냥 '입을 닫는 것'입니다.
입을 닫는 -침묵- 것이 영적 훈련에 꼭 필요한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말하고 싶을 때 참는 것이 필요합니다. 의심의 말을 하기 전에 침묵하는 것,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급함을 버리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때인 것 같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힘들때 일수록, 이해가 안될 때 일수록 필요했던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이였던 것처럼,
모태에서 짓기전부터 예레미야를 아셨던 주님께서 부르실때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라고 곧 바로 말하기 전에 침묵함으로 순종했어야 했던 것 처럼,
오늘 저도 침묵함으로 순종하길 원합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삼상 12:16)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로 이끄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 지금 저에게 필요합니다. 그냥 '가만히 서서 ' ... 무언가 하고 싶고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있을때에라도 때로는 "가만히 서서" 있기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침묵' 침묵이 나를 살립니다.
떠들면 떠들수록 나에게 있는 불신앙이 힘을 얻게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믿어지지 않습니까? 그럼 침묵! 침묵하세요.
말하고 싶어도 입술을 악물고 참으세요. 참으면 때가 되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보게 될 것입니다.
"너는 그들 때문(그 문제 때문에)에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8)"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침묵이 때로는 말하는 것보다 위대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일 수 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막대기를 던졌습니다.
막대기 끝이 동쪽을 가르켰습니다.
"어 하나님 실수 하셨네요. 다시 던집니다"
또 던졌습니다.
이번에는 서쪽을 가르켰습니다.
"아이~ 하나님 이번에도 실수 하셨네요. 이번에는 제대로 말씀해 주세요"
다시 던졌습니다.
이번에는 막대기 끝이 북쪽을 가르켰습니다.
"그래요 하나님 바로 그쪽입니다^^"
....................
이게 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이해가 되고 동의가 되시는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까?
그냥 업조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정하시면서 사시나요?
전 때로는 이해안될때가 있습니다. (목사인데도 ㅜ.ㅜ..)
아니 많습니다. 이해 되기 보다 이해 않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그건 그렇게 하시면 않됩니다." 라구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오셨습니다.
"(:5)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고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보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케하는 선지자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럴때 예레미야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전 이 문장이 이렇게 느껴졌습니다.
"잘못 선택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여, 잘못 말씀하셨네요 주님"
'그게 아니라'는 의미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주님 그건 아닌데요' 라고 들렸습니다.
저도 지금 그런 심정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도 했지만 내가 원하는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건 아니지요"라구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나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압니다.
그러나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달라스 윌라스가 쓴 '잊혀진 제자도'를 읽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 책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안식을 실현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되는 세가지 습관 내지 영적 훈련이 있다. 고독과 침묵과 금식이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로 부터 시행해 온 중요한 금욕훈련중에 세가지인데....'
마음이 불편하면 할 수 록 우리는 사람을 붙잡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내 마음이 이러하다, 내가 힘들다, 좀 알아주고 위로해주라...는 의미에서 말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반응을 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문제도 사람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때로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으로부터 답을 얻고 싶어서, 혹은 무언의 동의를 얻고 싶어서 사람에게 자꾸 말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광야가 편한 곳이 아닙니다. 불편합니다. 그러니 모이기만 하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이 그들의 40년동안의 삶이 였습니다.
결국 그 불평하는 말이 모세를 향해 나타났고 그 불평은 결국 하나님께로 향한 의심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 이건 아닙니다. 하나님 잘못생각하셨습니다..."라고
끊임없이 쏟아 내었습니다. 세상에 누구보다 온유한 모세를 짜증나게 한 사건, 그 사건 중심에는 이런 '말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납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잘못보셨습니다. 하나님 이건 아닌데요. 전 어린 아이입니다. 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라고 ...
하나님을 가르칠려고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고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겸손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이 '그렇다'하면 나도 '그렇군요 주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 고 하는 데 '아닌데요 주님' 이라고 말한다면 겸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전 이런 교만이 있습니다. 이 교만을 이기는 방법은 '입을 닫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았습니다. 침묵하는 것입니다. 의심되고 걱정되고 부담이 되면 그냥 '입을 닫는 것'입니다.
입을 닫는 -침묵- 것이 영적 훈련에 꼭 필요한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말하고 싶을 때 참는 것이 필요합니다. 의심의 말을 하기 전에 침묵하는 것,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급함을 버리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때인 것 같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힘들때 일수록, 이해가 안될 때 일수록 필요했던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이였던 것처럼,
모태에서 짓기전부터 예레미야를 아셨던 주님께서 부르실때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라고 곧 바로 말하기 전에 침묵함으로 순종했어야 했던 것 처럼,
오늘 저도 침묵함으로 순종하길 원합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삼상 12:16)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로 이끄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 지금 저에게 필요합니다. 그냥 '가만히 서서 ' ... 무언가 하고 싶고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있을때에라도 때로는 "가만히 서서" 있기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침묵' 침묵이 나를 살립니다.
떠들면 떠들수록 나에게 있는 불신앙이 힘을 얻게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믿어지지 않습니까? 그럼 침묵! 침묵하세요.
말하고 싶어도 입술을 악물고 참으세요. 참으면 때가 되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보게 될 것입니다.
"너는 그들 때문(그 문제 때문에)에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8)"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침묵이 때로는 말하는 것보다 위대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일 수 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막대기를 던졌습니다.
막대기 끝이 동쪽을 가르켰습니다.
"어 하나님 실수 하셨네요. 다시 던집니다"
또 던졌습니다.
이번에는 서쪽을 가르켰습니다.
"아이~ 하나님 이번에도 실수 하셨네요. 이번에는 제대로 말씀해 주세요"
다시 던졌습니다.
이번에는 막대기 끝이 북쪽을 가르켰습니다.
"그래요 하나님 바로 그쪽입니다^^"
....................
이게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