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갑수 간사 (서울중앙 지구)
서론
한국의 국교는 불교?
불교는 유교와 더불어 한국사회와 역사를 지배해 오다시피 한 종교이다. 이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우리민족 속에 민족복음화의 푸른 계절이 오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불교를 잘 이해하고 성경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 매스컴을 통해서 황당한 사실을 들었다. 세계의 사람에게 한국에 대한 앙케이트를 조사하는데 지금도 한국의 국교가 불교인줄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는 한국에서 정치, 미술, 의식에 영향을 많이 끼쳐 왔으나 복음의 부흥의 역사를 가진 한국에 대한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민족복음화를 기도하고 있지만 오히려 한국이라는 족속에 대해서는 원주민인 우리가 더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도할 때 만나는 기독교외 타종교인1위 불교!
대학생들을 전도 할 때도 많이 만나는 타종교인은 불교인이다. 그러나 이야기해보면 껍대기만(?)불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경은 읽어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본인이 불교인인 이유는 자기어머니가 석탄일날 1년에 한번 사찰에 가거나, 불교집안 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찰들은 땅 때문에 돈이 많이 생겼다. 이권싸움으로 서울조계사에서 소림사영화 같은 상황이 뉴스에까지 상영되었으며 더 이상 고행을 하지 않고(나이키운동화신고시주, 고급승용차운행) 불경에나 불교전통에도 없는 ‘찬불대, ’찬불가‘, ’여름불경학교‘, 등 운영과 교세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어느 것을 따라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의 순수를 잃어버리는 것은 기독교에도있었고 다른 종교에도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불교가 복음 듣는 기회를 방해하며 사람들을 혼미케하여 반성경적 삶을 살게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승려들이 미운 것이 아니라 불교를 통해 영혼을 죽이는 사탄이 미운 것이다. 많은 승려들은 안타깝고 불쌍할 뿐이다. 불교문화권에서의 전도인으로서의 준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1. 불교의 기본사상
①연기사상(緣起思想) : 고통에 대한 인식론적 통찰
불교의 창시자의 본래 이름은 고타마 싯달타(Gotama Siddhartta)인데, 고타마는 ‘매우 좋은 소’라는 뜻이며 싯달타는 ‘목적을 달성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처니 불타니 하는 것은 모두 붓다의 음역(音譯)이며, 석가모니(Sakymuni)는 석가(Sakya)족의 성자(聖者,muni)라는 뜻이다. 또 여래(如來)라는 이름은 ‘타타가타’(Tathagata)라는 산크리트어를 한문으로 의역(意譯)한 것인데,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진리 그대로 오고 진리 그대로 간다’는 뜻이다. 고타마 싯달타는 B.C. 6세기 경에 인도북부의 코살라국에 속하는 한 조그만 부족도시국가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붓다(Buddha, 깨달은 자)가 되었다고 한다.
명상 끝에 깨달아 얻은 것 이것이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연기(緣起)란 모든 실재들이 하나도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독립함 없이 서로 원인이 되고 또 서로가 의지하고 관계하여 발생하고 소멸한다는 뜻이다. 십이연기설은 이러한 상의상관성(相依 相關性)을 12가지 단계적 범주 개념으로 묶어서 설명하는 것이다(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연기설은 사물의 인식론적인 것이다. 이 연결의 고리가 끊어지면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이연기‘라는 인식론적발견이 부분적인 진리를 함축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싯달타의 문제의식은 고통(苦痛) 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고통의 실체를 생로병사로 보았으며 이러한 고통스런 인생의 원인은 인간의 무지와 욕망에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무지에 있기 때문에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지를 깨뜨려야한다. 무지를 깨뜨린 것이 ’깨달음’인데 깨달음을 얻으면 곧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열반은 아픔도, 슬픔도, 눈물도, 고통도 없는 고요한 기쁨의 상태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하다보면 열반의 상태와 같은 것이 느껴질 수 있다. 사찰에서 치성을 드리면 병도 낫기도 한다 이슬람사원에서도 병이 낳기도 한다. 현상학적인 유익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사탄은 더 큰 것을 빼앗기 위해 그 정도의 미끼를 던질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진리판단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며, 현상에 근거하면 반드시 미혹의 영에 빠지게 된다.
<진리로보는창>
성경적세계관에서 최초의 문제의식은 ‘고통‘의 문제에서 출발하지 않고 ’죄‘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세례요한과 예수는 “회개하라”(마3:2, 4:17)는 선포로서 그들의 사역을 시작했다. 고통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과 그로 말미암은 죄악된 행위에 의해서 생겨난 죄의 부산물이다. 따라서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가장 큰 관심사가 고통의 제거에 있지 않고 죄의 제거에 있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 이다.
◉불교 : 무지→ 고통→ 깨달음→ 열반 / ◉성경 : 죄→ 고통→ 회개→ 천국
불교에서는 죄 대신에 무지를 이야기한다. 회개 대신에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불교에서는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하는 개념이 없다. 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속’이라든지 ‘용서’라든지의 개념이 들어올 수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도 필요하지 않다. 불교의 패턴은 매우 합리적이고 철학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거기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없다.
하나님의 영적, 도덕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모든 바알 종교의 특징이다. 바알적 신앙은 현세 기복적이어서 현세적 풍요와 다산을 복의 기준으로 삼는다. 결국 고통이라는 것은 사실상 현세적 복을 상실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현세적인 복에 또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알 신앙의 동전의 앞, 뒷면이다. 사단은 이러한 세계관을 통해 하나님과 의 관계문제, 즉 죄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 사단이 죄의 문제를 보지못하게 하는 것은 복음의 영광 즉 예수그리스도를 가리기 위해서이다.
②삼법인설(三法印說) : 모든 존재의 실상은 이렇다.
‘삼법인’에서 법(法)이란 진리(dharma)를 의미하며 인(印)은 확실히 그러하다는 인증을 의미한다. 즉 삼법인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혹은 열반적정(涅槃寂靜) 이라는 세 가지가 확실한 진리라는 의미이다
.삼법인설은 연기설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고정(固定)과 실체(實體)가 아닌 ‘변화’(變化)의 과정(過程)으로 보는 세계관이다. 이것은 마치 희랍시대의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설이나 주역적 과정철학 그리고 기(氣)사상이 보여주는 과정 철학적 성격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삼법인설 또한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과 고통의 발생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말한다.
<진리로 보는 창>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교만한 마음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은 심지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창3:5)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③사성제(四聖-言帝-) : 고통의 원인과 해결
‘사성제‘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서 불교의 교리를 고(苦),집(集),멸(滅),도(道)
라는 네 가지 개념으로 요약한 것이다. ‘고‘란 현실세계의 상태에 대한 설명으로서, 생로병사(生老病死), 미운 사람과 만남(怨憎會),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구하여도 얻지 못함(求不得) 등 인생의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뜻이다. ’집‘은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인식기능과 감각기관의 작용이 결집하여서 집착과 애욕 등을 일으키고 이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는 뜻이다. ’멸‘은 그릇된 인식 주관의 작용과 이로 말미암은 집착, 애욕을 끊어버리면 고통이 없어지고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도‘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말하는데 ’팔정도‘(八正道)가 여기에 속한다. 팔정도는 정견(政見-바른판단), 정사유(正思惟-바른생각), 정어(正語-바른말), 정업(正業-바른행위), 정명(正命-바른생활), 정정진(正精進-바른노력), 정념(正念-바른명상), 정정(正精-바른집중)의 여덟 가지이다.
<진리로 보는 창>
사실 불교는 매우 합리적이고 깊은 논리를 가진 매력적인 사상이다. 불교는 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옳아 보이며, 인간의 상식에 호소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한 대로 이길은 옳아 보이지만 필경 사망에 이르는 길이다.(잠14:12)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죄의 댓가는 사망이(롬6;23)이며 따라서 죄의 문제의 해결 없이는 사망을 피할 수 없다.
2. 대승불교의사상
공(空)이란 무엇인가?
대승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바로 ‘공‘(Sunya)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은 여기사상과 마찬가지로 상의 상관성을 함축한다. 그래서 서양의 불교학자들은 공을 ’상대성’(相對性,relativity)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공은 허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나 자성(自性)이 없다는 의미이다. 공에는 아고(我空)과 법공(法空)이 있는데 아공은 인식주관조차도 사실은 실체나 자성이 없다는 뜻이고, 법공은 객관적 현상계의 만유가 사실은 실체나 자성이 없다는 뜻이다. 사물은 서로 연관되어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삼법인설(三法印說)의 내용과도 맥을 같이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은 현상계(色)는 실체와 자성이 없으며(空), 공은 현상계와 독립한 어떤 것이 아니요 바로 현상계 그 자체의 모습이라는 뜻이. 사물을 개체로서 분별하는 인식의 경향성을 분별심(分別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분별심은 극복되어야 한다. 공의 차원에서 ‘가‘ 와 ’나‘ 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가‘는 곧 ’나‘요, ’나‘는 곧 ’가‘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대승불교는 열반(涅槃)이 곧 생사요 생사가 곧 열반이고 ’부처‘가 곧 ’범부‘(凡夫)요 범부가 곧 부처라는 논리 아래 소승불교를 비판하여 열반(涅槃)보다는 성불(成佛)에 궁극적 목적을 둔다.
1987년4월23일의 석탄일에 이성철 종정은 법어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사단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입니다”. 이것 역시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이라는 대립의 경지를 넘어서 공이라는 상대성의 경지에서 한 말이라는 것이다.
<진리로 보는 창>
불교의 공사상은 물리적 세계에서 적용되는 상대성을 모든 영역에 확대 적용하는 비약을 함으로써 도덕적 상대주의로 빠진다. 물리적 세계에서나 적용되는 부분적인 진리를 가지고 전체적인 비진리로 이끌고 간다. 그러나 성경은 교묘한 철학으로 무장한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 엄히 경고하고 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있을 찐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있을 찐저 (사5:20-21)
불교의 상대주의는 고상한 공의 철학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너무나 지혜롭고 명철해 보인다. 그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다. 천국은 천국이고 지옥은 지옥이다. 죄는 죄이고 의는 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단은 사단이다. 영생은 영생이고 사망은 사망이다. 이것을 뒤집는 말장난을 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철종정은 1993년 11월 4일 죽었는데 매스컴에서도 그 유명세를 알수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죽었다.
“일생동안 남녀 중생들을 많이 속였구나. 하늘에 두루 미치는 죄업이 수미산보다 높아서,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갈래나 되는구나.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토하여 푸른 산에 걸렸도다“ 물론불교에서는 공의개념으로 말한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어쩌면 산 속에서 수도만한 성철이 다른 사람 보다 죄를 많이 안 지었을 수 도 있다 분명한 것은 40년을 넘게 보통사람이 참기 힘든 수행을 통해 도달한 진리는 사영리의 제2원리 즉 모든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는 4분 안에 4원리와 복음을 영접하고 누구는 40년간 2원리까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복음은 비밀이기 때문이고 비밀은 가르쳐 주어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 성철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40년간 찾아해맨 진리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을 것 같다.
복음은 전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의 비밀을 몰라서 죽어 가는 인간들을 위해서 우리의 사역과 순장의 삶은 계속되야 한다.
3. 인과업보 : 자연론적 인과율의 도덕적 확장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인과업보 또는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전설 속에도 인연이라든지 인과업보를 중심사상으로 하고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불교의 용어로 인과업보는 인간과 대상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인간의 의지적작용(業,Karma)이 원인(因,hetu)이 되어서, 대상의 필연적반응(報,vipaka)이 결과(果,phala)로서 따른다는 뜻이다.
불교의 인과업보는 사실상 불교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의 전통적 사상으로서, ‘업’ 즉 카르마라는 개념에 입각한 흰두교 사상 체계의 핵심적인 법칙이다.
카르마의논리 : 우리의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의 업이고 우리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의 업이다. 따라서 업이라는 개념은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처지나 고통을 합리화시켜준다. 만일 우리가 지금 낮은 지위에 있거나 혹은 누군가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전생을 포함하여 과거에 지은 업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행한 바를 그대로 돌려 받고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보의 논리는 적어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우리마음에서 지워준다. 그리고 지금 현세에서 좋은 업을 많이 쌓으면 다음 생에서는 좀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업보의 나쁜 영향 : 우리가 노력하면 피할 수 있는 문제나 고통도 과거의 업보라는 생각 때문에 그냥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또 지배계층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죄의식 없이 착취나 억압을 자행하게 한다. 즉 자신들의 높은 지위나 권리는 과거에 자신들이 쌓은 좋은 업의 결과이고 자신은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아서 누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인도사회에서 천민계급(Sudras)이나 불가촉(不可觸)
천민(heUntouchable)에 대한 사회적 냉대나 차별은 이러한 업보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은 사상 때문에 인도사회는 계급구조가 정체되고, 사람들의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진리로 보는 창>
인과 업보와 같은 인과율은 합리적인 생각 같으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가 들어갈 틈이 없다. 아무런 대가없이 주어지는 ’선물‘ 이라는 개념, 용서와 대속의 개념은 인과율 안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행한 대로 보응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나타나는 인과율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공의로운 인과율을 적용하신다. 하나님을 믿든 혹은 믿지 않든,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인과율을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임의적으로 섭리하신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공의로운 하나님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인과율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인과율을 존중하시지만 인과율에 속박되어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과율이라는 자연의 일부법칙에 매어있는 이신론(理神論:deism)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종 여호수아를 위해서 태양을 멈추게 할 수 도 있으셨던 분이시다. (수10:12-13)
성경은 모든 것이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요9:1-3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느냐는 물음 / 욥42:7 죄 때문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에 대한답) 모든 것에 인과율을 적용한다면 남을 위한 ‘희생’ 이나 ‘사랑’ 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가 없다. 어떤 희생이나 사랑의 행위가 업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희생도 사랑도 아니다. 사랑을 준 사람은 당연히 업에 따라서 주어야할 것을 준 것이고,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업에 따라서 당연히 받아야할 것을 받은 것이 된다. 결국 인과율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과 희생이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논리이다.
4. 법주(法住)와 법계(法界)
사단은 거의 모든 사상을 통해서, 부분적인 진리를 교묘히 비약해서 결국은 비 진리로 이끌어 가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옳아 보이는 것에서 시작하여 결국 사망의 길로 유도하는(잠14:12)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역사를 기독교 안에서도 본다. 중세교회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그리스도(딤전2:5)외에 또 다른 중보자로서 성모마리아나 성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명확한 진리가 흐려지고, 드디어 행위로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비 진리가 슬그머니 들어왔다.
불교에서 만유는 무상하지만 이들 무상한 것 들 사이에 일정한 법칙이 있으며 이 법칙은 변하지 않고 상주한다고 공사상의 모순(공사상에 의해 모든 물체가 자성이나 실체가 없고 계속해서 변화한다면 공사상 자체도 불변하는 진리는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법칙이 필요했다)에 대해 대답한다. 이것이 소위 법주(法住)의 개념이다. 또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로 해서 성립해 있는데 이것을 ‘법계‘(法界)라고 한다.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네 가지 법계는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이다.
<진리로 보는 창>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은 사사무애법계와 같이 거의 전지 전능한 차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법계사상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걷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상으로 귀착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범신론적 동일철학이 도달하는 결론인 것이다.
5. 불신관(佛身觀) : 불교의 삼위일체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달타 당시에는 어떠한 불신관도 없었다. 싯달타는 단지 깨달은자, 즉 부처로서 존경받았으나 신격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오면서 ‘삼신설’(三身說)이 발달하면서 부처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공의 개념에는 부처의 존재와 부처의 가르침조차도 항상 변화하지 않느냐는 의문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 때문에 진리의 항상 불변성을 의미하는 법주의 개념과 부처의 항상 불변성을 의미하는 법신의 개념이 생겨났을 것이다. 삼신불은 일반적으로 법신불(法身佛),보신불(報身佛),화신불(化身佛), 혹은 응신불(應身佛)-(부연-불교에서 부타관은 경전과 종파에 따라서 견해를 조금씩 달리한다. 이는 불교의 불타관이 원시불교에는 없었던 것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발전해나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을 말하는데 원래 이 삼신불에 대한 관념은 이신불(二身佛)을 거쳐서 세친(世親:5세기경)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확립된 것이다.
◉법신불:설명할수도 볼수도 생성되지도 않는 것이다. 법신불은 생생히 약동하는 진리 그 자 체로서 비로자나불(毘盧慈那佛)이라고 불리운다. 진언종(眞言宗)에서는 대일여래 (大日如來)를 법산불로 간주하는데 이는 태양신 숭배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신불:법신이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 몸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약사여래불(藥師如來 佛)이 보신불에 속한다.
◉화신불:화신불은 현실세계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과 같은 육체를 지니고 중생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처의몸으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여기에 속한다. 화신불 은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외에도 과거불과 미래불이 있는데, 미래에 나타날 화신불 이 곧 ‘미륵불’(彌勒佛)이다.
<진리로 보는 창>
삼신불 사상은 언뜻 보기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매우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불교의 삼신불은 하나의 본체(本體,substance)인지는 몰라도 엄밀히 말해서 3위격(位格,person)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보신불만 하더라도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있고, 화신블도 과거의 육불(六佛)과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미래불인 미륵불등 많은 위격이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삼신불은 불(佛)의 양태와 기능에 따른 양태론(樣態論)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면에 착안하여 많은 사이비종교의 교주들은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우리나라의 삼신(三神)사상 등 모든 종교의 뿌리는 하나라고 주자한다. 또 한 걸음 나아가서 불교에서 기다리는 미륵불이나 기독교인이 기다리는 재림예수 그리고 정감록(鄭鑑錄)의 정도령은 같은 인물이며 자기자신이 바로 정도령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모든 종교는 다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퍼뜨리는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비슷한 방법으로 일을 꾸며왔는데, 그 결과 사이비(似而非)와 이단(異端) 사상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이비는 ‘비슷하지만 아니다’ 는 뜻이며, 이단은 ‘끝이디르다’ 는 뜻이다. 이두가지는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으로서 언뜻 보기에는 옳아 보이지만 그 본질과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성경은 때때로 사단이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고후11:14)
6. 보살(菩薩)과 보살행(菩薩行) : 불교 구원관의 변화
우리나라 절에서는 여성 신도들을 부를 때 주로 ‘보살’이라고 부른다. 보살은 산킈트어의 ‘보띠싸트바’(bodhisattva)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대승불교에서 발전된 개념이다.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승(乘)‘이란 수레를 의미한다. 즉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레를 타야하는데 소승불교는 문자 그대로 ’작은수레‘라는 뜻이다. 그러나 소승이라는 용어는 소승불교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칭하는 말이 아니라 대승불교를 외치는 사람들이 소위 ’부파불교‘(部派佛敎)를 경멸하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부처가 죽은 후 백년 경, 계율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 승려들이 모여 종교회의를 열었는데 이것을 제2집결이라고 한다. 이 때 계율의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상좌부(上座部)에 대립하여 대중부(大衆部)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분파가 처음으로 생겼는데 이들이 대승불교의 시초가 된다. 대승불교운동은 율법주의적, 이론적, 독선적, 이기적 태도를 버리고 부처 본래의 뜻을 살리자는 운동이었다. 종래의 소승불교의 출가자들은 개인적으로 열반에 이르러 ’아라한‘(arahan)이 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에 반(反)해서, 대승불교의 출가자들은 이러한 개인주의적 한계를 극복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과 함께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살의 도(道)를 실천하고자 했다. 즉 보살은 스스로 성불하는 것을 보류하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염원을 세워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하며, 보살행은 이러한 보살도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의 개념은 원시불교가 말하는 ’깨달음을 통한 자력구원(自力救援)‘ 이라는 성격을 변질시켜 ’타력구원(他力救援)의 길을 열어 놓았다. 중생들은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아서 열반에 들어가거나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이나 부처의 도움에 의지하게 되었다.
<진리로 보는 창>
불교 신자들 중에는 기독교에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있고 예수의 공로에 의지한다는 믿음이 있으며 또 천국의 개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에서도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불, 보살이 있고 보살의 공로에 의지한다는 믿음이 있으며 극락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와 불교는 매우 비슷하며 기독교는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승불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를 알지 못하는 말이다. 대승불교는 깨달음을 통해서 열반에 이른다는 소승불교의 주장이 일반 민중에게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방법임을 인정함으로써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열반‘이라는 개념 대신 ’성불‘이라는 개념을 목표로 두고, 성불로 가는 중간 단계로서 극락을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사람들이 불, 보살을 숭배하고 극락에 가는 것은, 그 차체로서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성불의 중간단계(성불의 중간 단계로 소위 아미타불의 ’서방정토(西方淨土)가 있으며 불, 보살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그들의 공덕으로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새롭게 생겨나게 된 생각)이며 성불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나 신앙의 행위가 또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과 천국에 가는 것은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다. 대승불교의 타력구원 신앙과 기독교의 타력구원 신앙 사이의 또 하나 궁극적인 차이점은 죄와 사망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즉 대승불교의 타력구원 신앙에서는 속죄(贖罪)와 칭의(稱義) 그리고 영생(永生)과 사망의 이김이 없으며, 단지 성불의 중간 귀착지로서의 내세에대한 약속만 있다. 그러나 이 성불이야말로 ‘인간이 곧 우주의 궁극자임을 주장하는 강력한 동일철학(;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질 등이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실체가 아니고 근본에 있어서는 그들을 절대적 동일자(同一者)이며 대립은 한낱 현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셀링의 철학)적 개념이라 할 것이다.
7. 그외 불교에 관한 바른 이해
①불교의 주문 : 불교의 진언은 원래 경전의 일부분으로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 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많은 불교신자들이 경전의 의미도 모르면서 산크 리트나 팔리어 경전을 한문으로 음역한 것을 외우거나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을 낭독한 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계적 암송을 통해서 ‘부처의법력’(法 力)을 끌어들일 수 있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교의 주문, 천주교의 주 기도문이나 영광송, 흰두교의 만트라, 무슬림의 살라트)
②염주 : 기계적 신앙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염주를 돌리는 반복된 동작은 곧 기계적 동작이 며 기계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염주를 돌리는 반복된 동작이 주문을 외는 횟스를 세기 위한 것이든, 정신집중을 해서 몰아경이나 무아경의 상태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든, 혹은 염주자체가 어떤 마슬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든, 그것은 신 과의 어떤 인격적 관계도 전제하지 않는다.
③불교의 부처의 사리 숭배 : 폴리네시아의 애니미즘에서는 마나(mana;힘)를 소유한 능력있 는 자들이 소유하던 물건이나 그의 머리카락, 유골 등에는 동일한 능력이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다. 이것을 감염주술(cotagious magic)이라고 하는데, 불교의 부처 사리의 숭배는 그러한 인간들의 생각의 혼합이다. (중세시대천주교에서 성자(聖者) 들의 유골이나 유물숭배, 민속이슬람에서 성자(聖者)들의 유골이나 유물을 숭배하 는 것, 십자가자체가 자신을 지켜줄 것 같은 마음과 믿음; 드라큐라에 대한 무기)
[참고서적]
“세계관과 영적전쟁“ -안점식-
“세계관을 분별하라” -안점식-
“종은 세계관” -이건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