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가끔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 강력한 견해의 차
이를 표명할 때가 있다.
그러나 주 예수 안에서 신자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놀라운 통일성
때문에 그들의 견해 차이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벅스톤은 이 복
된 진리를 예증해 주는 이야기 하나를 들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두 적군이 퍼터맥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강기슭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북부 군악대가 민요를 연주할 때마
다 남부 음악가들도 남부인들의 마음에 드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한 번은
한쪽 군악대가 "즐거운 나의 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즉시 경쟁은
그치고 양군 음악가들이 하나가 되었다. 곧 양쪽 강기슭에서,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라"하고 울려퍼지는 양군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 한다.
벅스톤은 이런 말로 그 이야기를 끝맺었다. "이처럼 우리 순례자의 무리는
하나의 강한 고리에 서로 묶여 우리의 고향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꼭 같은 "집"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시간
을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신중하고 근면한 성경공부의 중요성과 건전
한 교리를 강조할 필요성을 경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진리를 알아야 하고 또 그 입장에 서야
한다. 그러나 신자들간에 가끔 논쟁으로 야기되는 증오심은, 우리가 "즐거
운 나의 집"과 천국의 고귀한 가족으로 함께 나눌 교제를 명상한다면 사랑으
로 바뀌어지게 될 것이다. 이 매는 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 친구
우리는 세상에서 출세하고 행복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부푼 희망을 안고 길을 떠났던 탕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란 가정의 모든 구속을 거부하고 집을 떠나 갈때 그의 존재를 온통 사로잡았을 들뜬 기분과 기대감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가 기대했던 세계에 도착하자 많은 친구들이 그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며 자기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은 채 탕자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당분간 탕자의 충실한 친구로써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탕자에게서 무엇인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선까지 그들은 탕자의 친구가 되어 주겠지요.
그러한 친구들은 철새를 닮아서 투워지면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나에게 아직 쓸 돈이 남아 있다면 그들은 나의 친구가 될 것이지만 만일 나의 금고가 비어버리면 아무도 나의 곤궁을 채워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친구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사람은 친구가 없으면 외로워서 살지를 못합니다.
이태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친구가 없는 사람은 메마른 몽둥이와 같다"
친구,언제 들어도 참 좋은 말이죠.그렇게 좋은 친구가 때로는 우리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릴 때가 있다는 겁니다.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가장 친한 친구의 거짓 증거로 득배를 마셨고,
로마황제 씨이저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이렇게 외쳤습니다.
" 진정한 친구란 이 세상에 없구나"
한탄하며 죽어갔습니다. 믿었던 친구였는데, 나를 도와 주어야 할 때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서 버리는 매정한 친구를 우리는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 두고봐라, 네가 날 무시하다니 "
복수의 칼을 갈면서 증오심을 키워 나갑니다. 내가 당한 만큼 반드시 갚아 줘야 합니다. 그래서 복수하기 위해 공부하고,복수하기 위해 돈을 법니다.보란듯이 내가 출세하여 나를 무시한 그 친구의 인생을 보기 좋게 망가뜨려야 속이 후련합니다.
세 아이가 풍선을 갖고 놀고 있습니다. 한참을 신나게 놀고 있던 아이들 중 한 아이의 풍선이 그만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악을 쓰며 웁니다. 보다못해 엄마가 달려와서 다른 두 아이의 풍선을 모두 터뜨렸습니다. 그제서야 악을 쓰며 울던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다른 놀이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나와 같은 위치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평안해 집니다.이것이 바로 인간의 성품입니다.
나의 진정한 친구는 누구인가?
내가 믿고 있는,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 친구는 얼마나 나에게 좋은 친구인가?
아무리 좋은 우정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우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나를 도와 줄 수 없다는 얘기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에게 만일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기쁨을 함께 나눌 친구가 있다면, 나를 위해 목숨이라도 아낌없이 내어 놓을 친구가 있다면 진심으로 축하는 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느리고 산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위해 울어 줍니까?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아파 줍니까?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 있습니까? 그러한 친구가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친구 한 분을 소개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어떤 고통 중에 처해도, 설령 내가 죽음에 직면해 있다 할지라도 그분은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 죽음의 자리로 서슴없이 가 주실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분을 친구로 맞이 하십시오.
내 친구가 되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요 창조주 이십니다.
그분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친구라"
- 은혜와진리교회 남선교회 회지 기고문 -
*진정한 우정은
진정한 우정은 간단하게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으면 진정한 우정은 자라지 않는다.
-17세기 영국의 정치가 체스터필드 -
*친구가 없는 삶은 황폐한 사막과 같다
인생이 이땅에서 살면서 진정한 우정을 나눌만한 친구가 없다는 것은 생의 큰 자산 하나를 잃어버린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리고 우정이 짙게 깔린 인격작인 교제가 없는 삶은 한마디로 말해서 삭막하고 황폐한 삶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로 참친구가 없다는 것은 곧 인생살이에 있어서 무형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은 내게 차원높은 친구 하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시다.
(요15:15) 내가 찾아서 만난 친구가 아니다. 그분이 날 친구로 삼기 위하여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 찾아오신 것이다.
*좋은 친구
작고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어느 해엔가 케네디 대통령의 조찬 초대를 수락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조반 한끼 먹으러 멀리 워싱턴까지 갈 마음이 없어서 거절했다고 하였는데. 이런 사람은 좀 독특한 인물이고. 그런 초대라면 대개는 병상에 누운 아내를 두고라도 달려 가리라고 짐작합니다.
개인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이상.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초대는커녕 오지 말라고 하여도 찾아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늘어서기 때문에 비서들은 골치를 앓습니다.
그런데만왕의 왕이시며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낮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시니 이렇게 감사. 감격할 일이 또 있을 수 있겠읍니까. 그가 오시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시며.
이처럼 한심한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진정 위대하게 되기를 원하면 진정 위대한 인물을 벗삼아 사귀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를 친구로 삼으시렵니까.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변하는 변덕장이를 친구로 삼으면 자연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마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는 것이 가장 자랑스럽고 마음 든든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 친구를 위하여 대신 죽은 병사
미국 남북 전쟁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할 때에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들을 제비뽑았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도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친구 가운데, 부모도 안 계시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아니한 젊은이가 있다가 대신 자원해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그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하니까 그도 감격해서 대신 그 젊은이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 동네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대신 나간 사람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깊었던 가는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문을 보면 얼른 전쟁 뉴우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거기 혹 자기 친구가 들지 않았는가 해서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 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 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 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보고 이 사람이 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 묘지에 그 시체를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는 간단히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라는 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멍에를 같이한 자
일찍이 우리 나라나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한 마리가 다른 소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면 빙 돌아버립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여러 번 보습 쟁기를 잡아보았습니다.
소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딥니까? 그런 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는데도 보습을 땅에 대고 보니까 막 달아나는 것처럼 빨라 보입니다. 양쪽 소를 번갈아가면서 이쪽으로 몰기도 하고 저쪽으로 몰기도 하는데, 그 모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른쪽 소의 고삐를 탁 채서 빨리 가게 하면 보습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왼쪽 소를 빨리 몰면 이 쟁기는 오른쪽으로 돌아갑니다. 두 마리 소를 같은 보조로 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뒤져도 안되고, 가다가 한 마리가 숨을 돌리고 쉬어도 안됩니다.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은 본디 부부간을 이야기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동업자간에도 이 말을 씁니다. 동반자요 가까운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은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에는 저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4:3에서 표현한 '참으로나와 함께 멍에를 같이한 자'란 이토록 절실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유기적이요 균형잡힌 공존적 관계인 것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전파에 한마음으로 힘썼다는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형제의식의 결여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맏아들이 이렇게 아버지에게 불평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맏아들이 자기 동생을 호칭할 때 이 아들 즉, 당신의 아들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형제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맏아들에게 말하기를 “네 동생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의식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한국 교인들은 수직적인 관계는 아주 잘 맺는 편이다. 그러나 수평적 관계는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 져야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성도간에 있어야할 형제의식이 결여된 한국 교회의 문제는 심각하디.
형제 의식이 빈약하기 때문에 그에 상반된 의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로 계급의식이다.
교회에서 직분하나 얻으면 그것을 계급화 해서 군림하려 든다.그러나 더 많은 직분을 맡기는 것은 그만큼 큰 종이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종이 돼야 한다.
그리고 형제를 섬길 줄 알아야한다.
*세 가지 인간관계
근세 유명한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인간
관계를 세 가지로 진단했습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입니다. 오늘
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차버립니다. 남편과 아
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의 관계로 전락하고 있습니
다. 이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 부버는 또 하나의 관계로 '나와 그것의 관계'라
고 이야기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그때 '나와 그것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습니
다. 나는 너를 인격으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
다.
여기서 끝나면 부버는 그렇게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
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주어도 우
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인격적인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다. 이것
이 인간성의 연약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이 인간관
계를 중매하는 하나의 촉매자가 필요하다." 부버는 그 촉매자를 '영원자 너'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너'는 바로 예수 그
리스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간과 인간으로 부딪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얼마나 많은 단점
을 발견합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아내,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남편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함께 만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무릎을 꿇을 때에 비로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놀라운 관계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 지휘자
독창이나 독주가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합창이나 합주를 따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세련된 교향악단의 연주는 모든 음악의 최고봉이라
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심포니의 연주를 라디오나 축음기를 통하여 들으면
언제나 한 가지 불만이 있습니다. 그 불만은 다름아니라 지휘자를 직접 볼
수 없다는 한 가지 사실입니다.
그 많은 단원 앞에 어엿이 서서 자신만만한 자세로 지휘봉을 흔드는 그의
모습에는 힘과 아름다움이 넘쳐흐르고, 지휘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예술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휘자는 연주하는 음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원 각자의 직분과 책임도 철저히 알고 있으므로 여러가지
의 악기가 각기 발하는 각종의 음향을 적절하게 다듬어, 절묘한 하모니를 창
조합니다. 심포니의 연주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인생 자체의 신비로움을 직접
경험하는 듯 합니다.
바이얼린, 첼로, 플루우트, 바순 등의 그 많은 악기의 모양과 소리가 다
다르고, 그 악기마다 연주하는 사람이 다 다르지만, 결국은 악기도 하나요
연주자도 하나라는 느낌이 절실하여 집니다. 개성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전
체의 조화가 깨어지지 아니하며, 절대의 조화가 있지만 각자의 개성이 말살
되거나 무시되지 아니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모신다면 우리가 연주
하는 음악이 필시 세계 전체를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지휘자 예
수를 바라보며 각자가 최선을 다하여 연주하면 위대한 음악은 꼭 창조되고야
말 것입니다.
*기러기의 생태
기러기 생태를 읽고는 깊은 감명과 인간으로서의 부그러움을 느꼈습니다.
기러기가 떼를 지어 날아가는데, 그러면 혼자 날때보다 70%나 더 오래
날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기러기가 V 형을 만들어 나는가?
그렇게 하면 공기대( Swath of air)가 형성 되어 뒤에 있는 기러기들이
날기 쉽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을 나는 기러기가 더 빨리 피곤해 집니다. 그래서 기러기들은
가끔 자리를 바꾸어 날음 으로써 서로 피로를 덜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러기 들은 여행을 하면서 왜 울까요?
우리가 부르는 노래처럼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9만리..."가 아니라
동료들에게 자기 위치를 알려 안심시키며,함께 여행하는 동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정말 훌륭한것은 병이나 부상으로 낙오자가 생길 때 두세 마리가 함께
머물러 다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함께 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가끔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 강력한 견해의 차
이를 표명할 때가 있다.
그러나 주 예수 안에서 신자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놀라운 통일성
때문에 그들의 견해 차이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벅스톤은 이 복
된 진리를 예증해 주는 이야기 하나를 들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두 적군이 퍼터맥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강기슭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북부 군악대가 민요를 연주할 때마
다 남부 음악가들도 남부인들의 마음에 드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한 번은
한쪽 군악대가 "즐거운 나의 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즉시 경쟁은
그치고 양군 음악가들이 하나가 되었다. 곧 양쪽 강기슭에서,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라"하고 울려퍼지는 양군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 한다.
벅스톤은 이런 말로 그 이야기를 끝맺었다. "이처럼 우리 순례자의 무리는
하나의 강한 고리에 서로 묶여 우리의 고향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꼭 같은 "집"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시간
을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신중하고 근면한 성경공부의 중요성과 건전
한 교리를 강조할 필요성을 경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진리를 알아야 하고 또 그 입장에 서야
한다. 그러나 신자들간에 가끔 논쟁으로 야기되는 증오심은, 우리가 "즐거
운 나의 집"과 천국의 고귀한 가족으로 함께 나눌 교제를 명상한다면 사랑으
로 바뀌어지게 될 것이다. 이 매는 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 친구
우리는 세상에서 출세하고 행복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부푼 희망을 안고 길을 떠났던 탕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란 가정의 모든 구속을 거부하고 집을 떠나 갈때 그의 존재를 온통 사로잡았을 들뜬 기분과 기대감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가 기대했던 세계에 도착하자 많은 친구들이 그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며 자기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은 채 탕자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당분간 탕자의 충실한 친구로써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탕자에게서 무엇인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선까지 그들은 탕자의 친구가 되어 주겠지요.
그러한 친구들은 철새를 닮아서 투워지면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나에게 아직 쓸 돈이 남아 있다면 그들은 나의 친구가 될 것이지만 만일 나의 금고가 비어버리면 아무도 나의 곤궁을 채워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친구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사람은 친구가 없으면 외로워서 살지를 못합니다.
이태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친구가 없는 사람은 메마른 몽둥이와 같다"
친구,언제 들어도 참 좋은 말이죠.그렇게 좋은 친구가 때로는 우리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릴 때가 있다는 겁니다.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가장 친한 친구의 거짓 증거로 득배를 마셨고,
로마황제 씨이저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이렇게 외쳤습니다.
" 진정한 친구란 이 세상에 없구나"
한탄하며 죽어갔습니다. 믿었던 친구였는데, 나를 도와 주어야 할 때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서 버리는 매정한 친구를 우리는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 두고봐라, 네가 날 무시하다니 "
복수의 칼을 갈면서 증오심을 키워 나갑니다. 내가 당한 만큼 반드시 갚아 줘야 합니다. 그래서 복수하기 위해 공부하고,복수하기 위해 돈을 법니다.보란듯이 내가 출세하여 나를 무시한 그 친구의 인생을 보기 좋게 망가뜨려야 속이 후련합니다.
세 아이가 풍선을 갖고 놀고 있습니다. 한참을 신나게 놀고 있던 아이들 중 한 아이의 풍선이 그만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악을 쓰며 웁니다. 보다못해 엄마가 달려와서 다른 두 아이의 풍선을 모두 터뜨렸습니다. 그제서야 악을 쓰며 울던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다른 놀이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나와 같은 위치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평안해 집니다.이것이 바로 인간의 성품입니다.
나의 진정한 친구는 누구인가?
내가 믿고 있는,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 친구는 얼마나 나에게 좋은 친구인가?
아무리 좋은 우정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우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나를 도와 줄 수 없다는 얘기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에게 만일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기쁨을 함께 나눌 친구가 있다면, 나를 위해 목숨이라도 아낌없이 내어 놓을 친구가 있다면 진심으로 축하는 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느리고 산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위해 울어 줍니까?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아파 줍니까?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 있습니까? 그러한 친구가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친구 한 분을 소개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어떤 고통 중에 처해도, 설령 내가 죽음에 직면해 있다 할지라도 그분은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 죽음의 자리로 서슴없이 가 주실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분을 친구로 맞이 하십시오.
내 친구가 되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요 창조주 이십니다.
그분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친구라"
- 은혜와진리교회 남선교회 회지 기고문 -
*진정한 우정은
진정한 우정은 간단하게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으면 진정한 우정은 자라지 않는다.
-17세기 영국의 정치가 체스터필드 -
*친구가 없는 삶은 황폐한 사막과 같다
인생이 이땅에서 살면서 진정한 우정을 나눌만한 친구가 없다는 것은 생의 큰 자산 하나를 잃어버린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리고 우정이 짙게 깔린 인격작인 교제가 없는 삶은 한마디로 말해서 삭막하고 황폐한 삶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로 참친구가 없다는 것은 곧 인생살이에 있어서 무형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은 내게 차원높은 친구 하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시다.
(요15:15) 내가 찾아서 만난 친구가 아니다. 그분이 날 친구로 삼기 위하여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 찾아오신 것이다.
*좋은 친구
작고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어느 해엔가 케네디 대통령의 조찬 초대를 수락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조반 한끼 먹으러 멀리 워싱턴까지 갈 마음이 없어서 거절했다고 하였는데. 이런 사람은 좀 독특한 인물이고. 그런 초대라면 대개는 병상에 누운 아내를 두고라도 달려 가리라고 짐작합니다.
개인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이상.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초대는커녕 오지 말라고 하여도 찾아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늘어서기 때문에 비서들은 골치를 앓습니다.
그런데만왕의 왕이시며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낮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시니 이렇게 감사. 감격할 일이 또 있을 수 있겠읍니까. 그가 오시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시며.
이처럼 한심한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진정 위대하게 되기를 원하면 진정 위대한 인물을 벗삼아 사귀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를 친구로 삼으시렵니까.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변하는 변덕장이를 친구로 삼으면 자연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마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는 것이 가장 자랑스럽고 마음 든든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 친구를 위하여 대신 죽은 병사
미국 남북 전쟁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할 때에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들을 제비뽑았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도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친구 가운데, 부모도 안 계시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아니한 젊은이가 있다가 대신 자원해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그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하니까 그도 감격해서 대신 그 젊은이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 동네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대신 나간 사람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깊었던 가는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문을 보면 얼른 전쟁 뉴우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거기 혹 자기 친구가 들지 않았는가 해서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 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 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 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보고 이 사람이 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 묘지에 그 시체를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는 간단히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라는 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멍에를 같이한 자
일찍이 우리 나라나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한 마리가 다른 소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면 빙 돌아버립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여러 번 보습 쟁기를 잡아보았습니다.
소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딥니까? 그런 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는데도 보습을 땅에 대고 보니까 막 달아나는 것처럼 빨라 보입니다. 양쪽 소를 번갈아가면서 이쪽으로 몰기도 하고 저쪽으로 몰기도 하는데, 그 모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른쪽 소의 고삐를 탁 채서 빨리 가게 하면 보습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왼쪽 소를 빨리 몰면 이 쟁기는 오른쪽으로 돌아갑니다. 두 마리 소를 같은 보조로 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뒤져도 안되고, 가다가 한 마리가 숨을 돌리고 쉬어도 안됩니다.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은 본디 부부간을 이야기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동업자간에도 이 말을 씁니다. 동반자요 가까운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은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에는 저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4:3에서 표현한 '참으로나와 함께 멍에를 같이한 자'란 이토록 절실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유기적이요 균형잡힌 공존적 관계인 것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전파에 한마음으로 힘썼다는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형제의식의 결여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맏아들이 이렇게 아버지에게 불평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맏아들이 자기 동생을 호칭할 때 이 아들 즉, 당신의 아들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형제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맏아들에게 말하기를 “네 동생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의식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한국 교인들은 수직적인 관계는 아주 잘 맺는 편이다. 그러나 수평적 관계는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 져야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성도간에 있어야할 형제의식이 결여된 한국 교회의 문제는 심각하디.
형제 의식이 빈약하기 때문에 그에 상반된 의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로 계급의식이다.
교회에서 직분하나 얻으면 그것을 계급화 해서 군림하려 든다.그러나 더 많은 직분을 맡기는 것은 그만큼 큰 종이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종이 돼야 한다.
그리고 형제를 섬길 줄 알아야한다.
*세 가지 인간관계
근세 유명한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인간
관계를 세 가지로 진단했습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입니다. 오늘
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차버립니다. 남편과 아
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의 관계로 전락하고 있습니
다. 이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 부버는 또 하나의 관계로 '나와 그것의 관계'라
고 이야기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그때 '나와 그것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습니
다. 나는 너를 인격으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
다.
여기서 끝나면 부버는 그렇게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
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주어도 우
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인격적인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다. 이것
이 인간성의 연약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이 인간관
계를 중매하는 하나의 촉매자가 필요하다." 부버는 그 촉매자를 '영원자 너'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너'는 바로 예수 그
리스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간과 인간으로 부딪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얼마나 많은 단점
을 발견합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아내,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남편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함께 만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무릎을 꿇을 때에 비로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놀라운 관계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 지휘자
독창이나 독주가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합창이나 합주를 따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세련된 교향악단의 연주는 모든 음악의 최고봉이라
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심포니의 연주를 라디오나 축음기를 통하여 들으면
언제나 한 가지 불만이 있습니다. 그 불만은 다름아니라 지휘자를 직접 볼
수 없다는 한 가지 사실입니다.
그 많은 단원 앞에 어엿이 서서 자신만만한 자세로 지휘봉을 흔드는 그의
모습에는 힘과 아름다움이 넘쳐흐르고, 지휘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예술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휘자는 연주하는 음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원 각자의 직분과 책임도 철저히 알고 있으므로 여러가지
의 악기가 각기 발하는 각종의 음향을 적절하게 다듬어, 절묘한 하모니를 창
조합니다. 심포니의 연주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인생 자체의 신비로움을 직접
경험하는 듯 합니다.
바이얼린, 첼로, 플루우트, 바순 등의 그 많은 악기의 모양과 소리가 다
다르고, 그 악기마다 연주하는 사람이 다 다르지만, 결국은 악기도 하나요
연주자도 하나라는 느낌이 절실하여 집니다. 개성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전
체의 조화가 깨어지지 아니하며, 절대의 조화가 있지만 각자의 개성이 말살
되거나 무시되지 아니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모신다면 우리가 연주
하는 음악이 필시 세계 전체를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지휘자 예
수를 바라보며 각자가 최선을 다하여 연주하면 위대한 음악은 꼭 창조되고야
말 것입니다.
*기러기의 생태
기러기 생태를 읽고는 깊은 감명과 인간으로서의 부그러움을 느꼈습니다.
기러기가 떼를 지어 날아가는데, 그러면 혼자 날때보다 70%나 더 오래
날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기러기가 V 형을 만들어 나는가?
그렇게 하면 공기대( Swath of air)가 형성 되어 뒤에 있는 기러기들이
날기 쉽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을 나는 기러기가 더 빨리 피곤해 집니다. 그래서 기러기들은
가끔 자리를 바꾸어 날음 으로써 서로 피로를 덜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러기 들은 여행을 하면서 왜 울까요?
우리가 부르는 노래처럼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9만리..."가 아니라
동료들에게 자기 위치를 알려 안심시키며,함께 여행하는 동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정말 훌륭한것은 병이나 부상으로 낙오자가 생길 때 두세 마리가 함께
머물러 다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함께 날 줄 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