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교
산동 선교사 이대영 목사는 말하기를 "내가 산동 선교사로 파송받은
후에 큰 난관을 만난 것은 어느 해 총회로부터 소환장을 받게 된 일인
데 소환의 이유를 물으니 선교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답하기를
"만일 다른 이유로 소환한다면 복종하려니와 돈이 없어 소환한다면 그
대로 선교하겠습니다."하고 한달 두달 있는대로 먹고 전도하고 있었습
니다.
중국에서는 설 명절을 잘 지키는데 설날은 닥쳐오게 되어도 우리 집
에는 식량이 어럽게 되었으나 나는 하나님을 믿고 전도비 주시기를 간
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루는 등기 편지를 받아보니 나의 본노회인 경북
노회에서 돈 천원을 보내면서 "만일 총회에서 전도비를 지불하지 못하
면 본 노회에서 독자적으로 담당할 준비가 있으니 염려말고 선교하라"
는 편지였습니다.
이 난관을 지내고 총회에서 다시 선교비를 계속 하였습니다. 전도비
를 염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에 충성할 것이요 믿고 기도하면
이루어 주십니다.
*밀림의 선교사 슈바이처 박사의 고백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는 그의 불란서인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
음과 같이 감사의 생애를 고백했다.
[자네가 이 편지의 회신을 또 받기전에 아마도 난 죽을것 같네. 내가 죽었
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슬퍼하지 말게나.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축복받은
자로 생각하고 싶네.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업에 60여년간을 헌신할 수
있었고 오늘 90세의 노구를 이끄는 이 순간까지 계속할 수 있음을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이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의 섭리이신 줄을
확신하고 나의 진심을 다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다네] 라고 하였단
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애를 끝마치는 최후의 그 순간까지도 평화로운
상태에서 자신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한다.
우리도 지금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은 주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식인종에게 의족을 떼어준 선교사
미국의 어떤 청년이 신앙생활을 누구보다도 잘하는 가운데 어느날 길을 걷
다가 교통사고를 만나 다리를 잘라버리게 되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절망
상태에 빠졌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목사님을 비롯해서 많은
교우들이 병문안을 와서는 모두가 위로의 말을 해존다는 것이 로마서 8장
28절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
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읽어주고 가
곤 했다는 것이다. 그 청년은 그 성경을 자주 읽어 주므로 한편 생각할 때
에 어제까지만 해도 성했던 내 다리가 끊어져 나가 불구가 되었는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고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아멘으로 받아드렸다. 그는 계속해서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
다가 뜻이 있어 신학교를 다니고 후에 목사가 되엇고, 그뿐 아니라 선교사
가 될 것을 결심하고 아프리카의 식인종들이 사는 곳으로 전도를 하러 떠나
게 되었다. 그 곳에는 가기만 하면 식인종들에게 잡혀 먹는 곳이었다. 이
선교사도 죽을 각오하고 그들이 사는 고장에 찾아 갔더니 그 식인종들은 좋
다고 하면서 잡아 먹으려고 했다. 그 때에 이 선교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
도를 한 후에 지혜가 떠올라서 자기의 의족인 고무다리의 고무 한 조각을
손수 베어서 그들에게 주었다. 식인종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
금까지 자기의 살을 베는 사람을 못 보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잘라서
선뜻 내어주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이 사람이 사람은 아니라 신(신)일 것이라
고 생각을 하고 추장을 비롯하여 모든 식인종들을 회개시키고 복음을 심었
다고 하는 것이다. 그후 그 선교사는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자기의 다리가 교
통사고로 잘리우진 것이 지금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고
다시 그 말씀에 큰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이다.
*타향에서 죽은 아펜젤러
우리나라의 초대선교사인 아펜젤러는 미국 펜실페니아 태생으로 주류대학
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어느날 중국선교사의 보고강연회에 참석했다가 중
국으로 선교를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가 졸업즈음에 한국에 가겠다던 친구가
안가겠다는 바람에 대신 자기가 가겠노라고 지원을 했다. 그리고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읠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을 의지하여, 27세때 아들이 물에
빠져 죽는 꿈을 꾸었다고 하며 반대하는 모친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왔다.
그는 교육사업을 시작하여 배재학당을 세우고 교회도 세웠다. 그는 두 번의
안식년을 위해 고국으로 들어갔었는데, 그때마다 친족, 친구들은 고생스럽
다며 고국에 머물기를 권했으나 그는 한국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런 다음
해 성경번역사업을 위해 목포에 갔다가 배가 충돌하였는데 같이 탔던 동행
인들을 구출하려다가 자신이 희생당하고 말았다. 아펜젤러는 우리 민족의
어렵교 빛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정든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타향
에 와서 자신을 희생하게 된 것이다.
*계속된 선교
산동 선교사 이대영 목사는 말하기를 "내가 산동 선교사로 파송받은
후에 큰 난관을 만난 것은 어느 해 총회로부터 소환장을 받게 된 일인
데 소환의 이유를 물으니 선교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답하기를
"만일 다른 이유로 소환한다면 복종하려니와 돈이 없어 소환한다면 그
대로 선교하겠습니다."하고 한달 두달 있는대로 먹고 전도하고 있었습
니다.
중국에서는 설 명절을 잘 지키는데 설날은 닥쳐오게 되어도 우리 집
에는 식량이 어럽게 되었으나 나는 하나님을 믿고 전도비 주시기를 간
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루는 등기 편지를 받아보니 나의 본노회인 경북
노회에서 돈 천원을 보내면서 "만일 총회에서 전도비를 지불하지 못하
면 본 노회에서 독자적으로 담당할 준비가 있으니 염려말고 선교하라"
는 편지였습니다.
이 난관을 지내고 총회에서 다시 선교비를 계속 하였습니다. 전도비
를 염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에 충성할 것이요 믿고 기도하면
이루어 주십니다.
*오빌 라이드 선교사
어느 날 저녁 멕시코 과달라쟈라에 있는 선교본부에 죠세 곤잘레스라는
13세의 소년이 걸어 들어왔다. 저녁예배가 끝날 무렵 그는 앞으로 나와 예
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 소년과 상담한 오빌 라이드 선교사는 그가
아버지를 잃고 갈 곳이 없어서 제빵공장 화덕을 온돌삼아 자는 소년임을 알
았다. 그 선교사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두 살난 아들은 미국으로 보냈으
므로 그 소년을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여 같이 기거하며 학교를 보냈다. 선
교사는 소년을 의과대학에 보내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의사가
되게 했다. 라이드 선교사가 양육한 많은 소년들은 의사, 변호사, 목사, 기
술자, 교사 등이 되어 모두 각각의 일터에서 일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산 증인들이 되었다. 라이드 목사는 그의 시에서 "한 소년이란 얼마나 귀한
가? 누구의 손에 붙잡혔는가에 따라 다이아몬드가 되거나 파멸의 폭탄이 될
수도 있다. 마귀와 죄가 열심히 그들을 부르고 있는데 교회는 그들을 부르
고 있는가? 썩을 것에는 투자하면서 소생하는 생명을 위하여서는 얼마나 투
자를 하고 있는가?" 라고 했다.
*첫 중국선교사
1807년 영국의 로버트 모리슨목사는 첫 중국선교사가 되어 중국 광동
에 도착했다.
그때 영국 선장은 비웃는 투로 [이제 당신은 중국사람들을 감화시키
러 가는 군]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리슨목사는 조용히 웃으며 [내가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하
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요]라고 말했다.
이후 모리슨목사는 핍박과 역경을 신앙으로 이겨내며 1810년에 사도
행전 번역본을, 1841년에 중국방언사전과 문법책을, 1819년엔 신구약
을 번역하고 1923년엔 신구약을 21권으로 출간해 중국선교의 금자탑을
세웠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
서 4:13)
*리빙스턴 선교일화
아프리카 선교사업에 큰 공헌을 한 리빙스톤의 일화.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헌신하다가 영국에 돌아와 옥수포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던날 예배시간에 학생들에게 설교하게 되었다.
그때 리빙스턴은 사자에게 공격을 받아 불구가 된 한쪽 팔을 옆구리 아래로 늘어뜨리고 고통스럽던 나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내가 어떻게 고독과 고통과 역경을 이겨나갔는지그 비결을 지탱하게 해준 것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주의 약속이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내곁에 서서 나와함게 하심을 확신할 수 있 없었다면 저는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선교는 실제적이어야 한다
래브라도 주의 유명한 선교사인 그렌펠 박사의 74회 생일에 그를 만
나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에게 선교의 성공 비결을 물어
보았다.
이 때 박사는 종이와 연필을 다라고 하더니 큰 상자 같은 것을 그리
고는이렇게 말하였다.
"래브라도 어부들은 파도가 심한 바다의 피해를 많이 받고 있습니
다.
그래서 그들의 배는 많이 파손당하며 심지어는 어렵게 잡았던 고기를
배와 함께 잃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럴 경우 수입이 적어져
때로 는 식구를 굶길 형편입니다.
첫째로 그들을 구제하는 방법은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이
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과 같은 배를 올려 놓는 대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요. 배를 수리할 때에 올료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
여 배를 수리해서 잡은 고기를 덜 잃어 버리게 되자 그들의 생활이
나아졌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복음을 전했지요. 그 때에는
생명을 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선교사와 군인
인도에서 전도하는 선교사가 해군 장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해군 장교가 말하였다.
"왜 선교사들은 고향에서 편히 일하지 않고 구태여 미개한 백
성들과 걱정을 같이하며 토인들에게 전도합니까?"
그 때는 터키인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던 때라 영국 해
군성으로부터 인도에 있는 해군은 콘스탄티노플로 출발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때였다. 선교사가 장교에게 "당신은 내일 콘스
탄티노플로 가게 됩니까?" 하고 묻자 장교는 상관의 명령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선교사가 "옳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대장에게로부터 천하 만민 어디나 가서 주님의 도를 전
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올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선교에 왕도는 없다
고포드 선교사 부부가 중국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지낫을 때였다. 나
이가 지긋하고 경험이 풍부한 어떤 선교사가 찾아와 어떻게 충고를
해주었다.
"이 곳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는 처음부터 다짜고짜로 예수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중국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 좋지 않은 편
견을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신들을 타파하는
일에만 몰두하십시요."
그 선교사가 돌아가자 고포드는 흥분해서 아내에게 말했다.
"안돼,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 터론토의 슬럼가에서 부랑자들
을 구원했던 복음이 바로 이 죄인들을 구언해야 하는 똑같은 복음인
게야."그러부터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선교사 몇이 고포드를 찾아
와서는 물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도 깊은 죄의 늪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띵 수 있었
던능력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또 단순하게 가르쳤을 뿐입니
다."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스커더 선교가문
스커더 가족은 역사상 다른 어떤 가족이 도저히 깨지 못할 선교적
기록을 수립했다.
존 스커더와 그의 아내인 실론은 인도에 선교사로 들어갔다. 그들에
겐자낡메열 명 있었는데, 다 성장하여 선교에 커다란 기여을 하였다.
하나는 목회를 준비하던 중 애석하게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나
머지 아홉은 모두 해외선교사가 되었는데 그 중 다섯은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스커더 가족이 인도에서 선교한 지 100년이 되던 1919년에는 세 명의
증손자들이 그 마을 향해 출항하였다. 아직도 31명의 자손들이 인도
에서 일하고 있으며 다른 일곱은 다른 곳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
다.
*스탠리
스탠리 일행이 아프리카를 탐험했을 때 그들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
지 못해 괴로워했다. 사람들은 "이미 기적의 때는 지나갔다."라고 말
했다. 그러나 스탠리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만일 좋은 것으로
여기시면내일이라도 고기를 주신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음 날 어디선가 모르게 닭이 수십 마리 날아왔으므로 그것들을 잡
아 여러 날 포식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로서 활동을 시작한 로버트 모팻은 1818년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부임한 이래 40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1819년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메리라는 영국 처녀와 결혼한 후 더 힘을
얻어 열심히 전도사업에 임했으나 처음에 그 성과는 미미하였다. 십
수년이 경과했으나 개종자는 적었고 교회 개척이나 그밖의 선교사업
적 성과도 큰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선교 활씩 있어 가장 대표적인 공헌은 원주민의 언어로
성경번역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언어와 문자의 체계가 다를 뿐 아
니라, 언어학적으로도 그 발달 정도가 매우 낮은 원주민의 언어로 성
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것
을 통해 마침내 복음전도의 올바른 근거가 마련되엇다. 그가 후발 선
교사들을 지도하고 충고하는 일과 함께 그들이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전도에 임할 수 있게 하는 선배로서의 공헌을 한 것디다.
*연봉 1만 5천 달러를 거절한 이유
미국의 최대 석유회사 사장이 중국에 석유회사 지사를 내면서 그 관
리자를 찾고 있었다. 이 때 회사에서 내건 관리자의 자격 요건은 30
세 미만이어야 하며,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중국어를 잘하고, 지도자
의 자질을갖춘 자 등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격 요건을 갖춘 적임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한 사람이 회사를 찾아왔다.
"귀사에서 찾는 적격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고용할 수는
없 을걸요."
"그래요? 그는 지금 얼마를 받고 있소?"
"그는 침례교 선교사인데 연봉 6백 달러를 받습니다.""만일 그가 우
리 회사에 온다면 긔 연봉은 1만 달러, 아니 1만 2천 달러를 주겠소.
정 안된다면 1만 5천 달러까지고 줄 수 있소."회사의 그런 제안이 선
교사에게 전달되엇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관심없습니다."
"하지만 연봉만을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연봉은 엄청납니다. 하지만 당신네 일이 너무 작아요. 당
신네 돈 1만 5천 달러를 받고 중국 사람들에게 석유를 파느니 지금처
럼 6백달러를 받고 중국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게 훨씬 큰일이오."
(조지 투루트)
*일본 선교 개척자
일본 개신교의 두번째 선교사로 기록되고 있는 성공회의 윌리엄즈
신부는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의 한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
찍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양육되었다. 그 어머니는 청교도 혈
통을 이어받았는데 윌리엄즈를 종교적 훈계로 엄격하게 양육하였다.
그래서 윌리엄즈는 어려서부터 일생을 전도사업에 몸바쳐 일할 것을
꿈꾸어왔고, 마침내 해회선교사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랜 세월 전도사로서, 특히 중국 선교에 헌신하다가 일본의 개항과
함께 일본 선교에 나섰다. 그는 일생을 두고 독신으로 일본 선교에
앞장선 바, 일본과 결혼했다는 평을 듣기고 했다. 그는 일본 최초의
개신교회당으로 통하는 나가사키 교회를 담임하였다. 이 교회는 1860
년에 설림되었는데, 개항장인 나가사키의 상인, 지방토호 등이 출석
했다. 이 교회에서 그가 세례를 준 다이샤우는 일본 개신교 두번째의
세례교인으로 기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