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이야기

2003.02.28 17:32

측은한 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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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어느 주일 저녁, 교회 근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였다. 뒤에서 들리는 소란스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술에 만취한 한 아저씨가 정류장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는 아주머니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왜 날 쳐다봐! 내가 그렇게 못생겼어? 왜 쳐다보냐고!”

작달막한 키에 회색 점퍼 차림, 거리에서 수없이 지나치는 평범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말도 안되는 시빗거리로 행패를 부리고 있는 거다. 아주머니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아무 대꾸없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삿대질을 하며 소 리 지르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아니면 냉소적인 반응이 거슬렸는지, 급기야는 손으로 아주머니를 밀치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한 사람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황급히 나를 지나쳐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걸 보고 있자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아니, 술 취하면 다야? 힘없는 여자는 만만하다 이거지….’

평소에는 용기가 없지만 화가 나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복잡한 문제에 끼어드는 걸 싫어하는 나도, 남녀차별이니 불평등이니 하는 문제에서는 좀 열을 받는 편이다. 이 문제는 나에게 그렇게 해석되었다. ‘어디에서 기분 상해 와서는 만만한 여자에게 풀겠다는거야!’

저러다 때리기까지 하는 건 아닌가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아저씨를 본 게 아니라 저 아가씨를 본 거에요”하는 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둘러대는 말이라고는 나도 생각했다. 아주머니가 아마 술 취한 아저씨를 한번 힐끗 쳐다봤겠지. 하지만 술에 취하고서도 다른 사람이 쳐다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나? 그리고 누가 좀 쳐다보는 게 뭐 어쨌다는 거야!

“아저씨가 아니라 저를 본 거라잖아요.” 내가 한 마디 했다.

“뭐야! 같은 여자라고 편드는 거야?” 아저씨가 소리쳤다.

정말 말이 안 통하네. 나는 이럴 때 부드럽게 넘어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더 대들어 얻어맞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아주머니가 재빨리 아저씨를 피해 내 쪽으로 걸어왔고 나는 마치 취객에 대한 대처방법을 잘 아는 사람처럼 “저런 사람은 상대하면 안돼요”하고 말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다. 아마 싸움이 났으면 고스란히 얻어맞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아저씨를 피해 약간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 우리의 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이리 좀 와 봐요”

누군가 했더니 아까 현장을 먼저 빠져나갔던 또 다른 아주머니였다.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는 얼른 달려가더니 둘이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간간이 귀에 그분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 왜 그런대요?”

“그냥 쳐다봤다고 그러잖아요.”

“오늘 뭔가 안 풀리는 일이 있었나 봐요.”

“그런가 봐요.”

그 때 마침 버스가 왔다. 부인네들은 안전하게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고 나와 아저씨는 버스를 탔다(내게 약간의 오기도 있었다). 그런데, 거리에서는 소란스러웠던 아저씨가 버스 안에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아저씨의 손에 들려있는 비닐봉투를 쳐다보았다. 어디 슈퍼마켓이나 마트에서 시장을 보고 들어가는 길인가 보다. 살림에 필요한 여러 잡동사니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갑자기 ‘버스에서 내리는 어딘가에, 저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가득 찬 버스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에선 아까 소리칠 때의 패기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체구가 작긴 하다. 회색 점퍼와 어두운 색 기지바지도 약간은 그를 초라하게 보이도록 한다. 어딘가 자신감 없어 보이고 고달파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 그의 외모에 대해, 행색에 대해 무어라고 했을까? 그의 모습을 우습게보고 함부로 대했을까? 그래서 자신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직장에서였을까? 아님 직장이 없는 걸까?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 후 고개를 돌려보니 아저씨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나도 달아올랐던 열이 차츰 식었다.

나는 비겁한 의도에서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인간이 참 싫다. 하지만 그 아저씨의 경우, 어쩌면… 그건 그냥 한풀이였는지도 모르겠다. 힘든 세상살이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금씩 묵과할 수 있는 그런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뭔가 안 좋은 일 있었나보네”하며 지나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는 일이 어찌 힘들지 않으랴. 내 부모님이 그랬듯이, 자신 이외의 다른 이들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무겁고 힘겨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저 어둠 건너의 어딘가 자신의 조그만 보금자리로 돌아간 그분에게 따뜻이 맞아주는 가족과 일용한 양식이 있기를 소망한다.

사람들의 약한 부분, 터진 생채기를 보는 일은 마음 편하진 않지만, 나쁜 일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결국 우린 모두 서로를 긍휼히 여겨야하는 그런 사람들인 걸. 측은한 정으로 서로 얽매여 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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