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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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 서른 세 살이었던 나는 노처녀란 딱지가 겹겹이 붙어서 어디다 내가 태어난 해의 띠조차
부끄러워 내놓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던 중 후배가 꼭 한번 만나보라고 조르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하고 첫선을 보게 되었는데 맞선 상대는 1시간이나 늦게 나타나고 물주로 덩달아 따라온 남자는 어찌된 일인지 정각에 나왔다. 그는 심심하게 생긴 데다가 별 특징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설령 그쪽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내 눈 속에다 불똥을 튀어보낸다고 해도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맞선을 봤던 그 사람 대신 덩달아 따라온, 게다가 얼굴조차 기억에 없는, 그리고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그 덩달이 사나이로부터 열불 나게 전화가 걸려오는 게 아닌가.
'아무리 그래봐라...'
나는 털끝만큼도 그와의 인연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나주다 그만 드라마처럼 사랑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연인사이로 발전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죽고 못살아 결혼이란 걸 했지만 신혼의 단꿈은 정말 잠시뿐이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혹독한 시집살이가 내 앞에 떡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첫 아이를 가지고 출산 예정일이 오늘 내일인데 남산만한 배를 해 가지고 여전히 시어른의 밥상을 날라야 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밥상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도 달려와 받아주기는커녕 그저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시어른과 아침식사를 하고 나는 혼자 부엌에서 눈물 섞인 밥을 넘기는 해괴한 일이 반복되었다.
'내가 이런 남자를 어디가 좋다고...'
나는 남편의 얄미운 손을 볼 때마다 첫 아이 때 생각이 나서 내 손을 잡으려는 남편 손을 쌀쌀맞게 뿌리치곤 했었다. 게다가 남편은 무드나 조심성이라곤 조금도 없어 한 끼 식사라도 냅킨에 수저를 나란히 놓고 촛불을 켜려고 하면,
  "특별한 날도 아닌데... 어디 힘들어서 같이 밥 먹겠어?"
이렇게 분위기를 확 깼다. 또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자고 하면,
"나대로 벗는 식이 있으니 나는 좀 빼줬으면 해."
"당신이 아무렇게나 신발 벗으니까 자꾸 걸려 넘어지잖아욧."
"조심해서 피해 다니면 되지 귀찮게 뭘 따지고 그래?"
이런 식이었다.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닌 일이고, 그런 일로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하기도 민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소한 다툼으로 생긴 틈이 조금씩 간격이 넓어지면서 나중엔 모임에 가서도 따로 앉아서 서로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집에 올 때도 제 각각 돌아오는 썰렁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아, 이대로 가다가는... '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이 들다가도 낮에 뭘 먹었는지 목이 타 들어가듯 말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무 고단해서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시러 가는 것도 끔찍했다. 비몽사몽 중에 몸은 안 움직이고 누가 물 좀 떠다 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굴뚝같고... 한참을 그렇게 설치다가,
'아, 물 마시고 싶은데...'
이렇게 중얼거렸나 보다. 잠꼬대 같은 그 소릴 들었는지 옆에서 부시럭거리며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여보, 일어나서 이것 좀 마시구 자."
나는 아직도 잠이 덜 깨어 눈이 떠지지 않은 채로 부스스 몸을 일으켜 컵을 입을 가져갔다. 벌컥 벌컥, 그야말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사람처럼 물을 들이켰다. 그렇게 달고 시원한 물을 내가 마셔본 적이 있던가. 나는 물 한 컵을 남김없이 다 마시고 나서 비로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단 잠이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이상하게도 간밤에 남편이 떠다 준 물 한잔이 퍼뜩 생각났다. 지난 밤, 목이 타 들어가는 갈증을 해갈해준 것도 그 덕분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것도 다 남편 덕이었다. 그가 모처럼 베푼 친절을 무심코 지나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아,
"여보..."
"어, 당신. 잘 잤어?"
"있잖아요... 당신이 어젯밤에 떠다 준 물은 생명의 물이었어요."
하고 말문을 여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찡해왔다. 그 말을 속으로 떠올렸을 때보다 입 밖으로 내어 뱉는 순간 묘한 힘이 느껴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가지 감정이 밀려왔다. 물 한 잔으로,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이렇게 우리 사이를 녹록하게 해 줄 수 있는 건데... 남편의 얼굴이 너무 환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쑥스러워하면서도 남편은 자신의 작은 일을 칭찬 받고는 적잖이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였을까. 남편과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서로를 힘들게 하며 세월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매일 아침 서로에게 칭찬을 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좋은 생각에 합의만 한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고마워요, 칭찬해요, 사랑해요, 이런 말들이 너무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얼굴을 빤히 맞대고 앉아 당신이 어째서 고맙다느니, 그래서 칭찬한다느니,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다는 것이... 칭찬의 말을 하는 것도 그랬지만 좋은 말 한마디 주고받는 것으로 오랜 습관이나 태도가 한꺼번에 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고... 게다가 온갖 깔끔을 다 떠는 내 눈에, 여전히 손톱깎이 하나 제자리에 두지 않는 남편의 무신경이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당신, 오늘 아침도 로션 뚜껑 닫지 않고, 면도기는 왜 제자리에 두지 않았어요.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요?"
"... ..."
"832번째야!"  하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근데 내가 그렇게 많이 했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달력에다 표시해 두었지."
"그럴 시간에 당신이 좀 치우면 덧나나. 헹."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다시 마주앉아 칭찬의 한마디를 건네기란 돌을 씹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아침마다 마주앉아 뭔가 칭찬할 거리를 생각해내고 노트에 적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832번인가 하는 숫자도 뇌리에서 사라지고 너무 깔끔한 버릇도 고치려고 한다. 남편도 불평대신 나의 깔끔함을 아침 시간에 슬며시 칭찬해 주는 것이었다. 좀 깔끔하면, 좀 지저분하면 어떤가. 이런 생각이 슬며시 드는 것이다. 언젠가 남편은 노트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당신처럼 깔끔한 여자를 만난 건 내 복인 것 같아. 예전엔 좀 유난 스러워서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말이야.'

사실 우리 부부는 늘 아침마다 식탁 위에서 촛불을 밝히고 아침 기도를 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서로에 대한 칭찬의 말을 나누기까지는 무려 20년이 걸렸다. 같은 길을 가자고 두 손 꼭 붙잡고 시작했지만 우리가 동행이란 걸 뼈저리게 느끼기까지 이렇게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상대방을 바꾸려고 애썼지만 이젠 스스로의 변화에 놀라고 있다.
이 변화가 칭찬하는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이라는 걸 난 요즘 조금씩 깨닫는다. 부부라는 이름표를 받는 순간 이인삼각 게임처럼 서로를 감싸안지 않으면, 그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걸 이제서야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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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도시락 편지'로 유명한 수필가이면서 소설가다. 20여 년 결혼생활 동안 식성, 습관뿐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등 별로 닮은 구석이 없는 남편과 아옹다옹, 티격태격 얽혔던 부부 생활을 매일 아침 칭찬 일기로 풀어가고 있다. 그리고 최근 이 칭찬일기를 노트와 묶어 '부부 일기'라는 제목으로 엮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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