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시보로에게 구한 긍휼♣
오늘 메일을 통하여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5년동안 개척교회를 섬기셨는데 지금 빚으로 인하여 쫒겨 나야 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부르짖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과 함께 그의 바람은 그 교회에서 부활절까지라도 드리고 문 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께 울며 메달렸을까..이런 생각들로 참 안타까웠습니다.
저도 이제 개척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분의 글속에서 그의 안타까움이 철철 묻어나는 듯 했습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고나 할까요.
저도 사실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이 기도 제목들 때문에 오늘은 너무 힘들었음을 고백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것 때문에 정말 답답함이 밀려 왔습니다. 저의 이 기도와 개척교회 목사님의 모습이 하나로 되면서 어찌나 힘들던지요.
고난 주간에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아랑곳없이 저가 진 십자가만 더 무겁게 느껴지니, 마치 제가 진 ‘고난주일의 십자가’라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지러 기도굴에 갔습니다. 기도하러간다기 보다 그냥 하소연하고 또 따저보고 싶어서, 그냥 답답해서 걸어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당하고 있는 기도제목들, 그 목사님이 당하시는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크고 무겁던지 기도도 되지않았습니다.
원망만 했습니다. 불평만 했습니다. 그 목사님을 소명으로 부르시고 개척하게 하셨으면 좀 잘되게(?)하셔야지요. 왜 문닫게 합니까? 영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개척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미리 말씀하셔야지요. 왜 2억의 빚으로 부활절도 못드리고 쫒겨 나게 합니까?
저도 개척하면 그렇게 하실랍니까? 저도 주님이 틀림없이 부르셨고 은혜로 인도하셨는데 나 만인가요?
저에게도 또 기도제목이 있잔아요. 왜 아무 말씀안하시고 침묵하십니까? 응답이 없나요? 손이 짧으신가요?..........
....“오네시보로 가정있잖니? 그 가정이 바울의 기도를 받고 그 후에 평안했겠니?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걱정도 없이 잘 먹고 잘 살았겠니?
바울을 잘 섬기고 시원케 했던 그와 그 가정이 평안하게 살다가 죽었겠니?
또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그렇게 살도록 긍휼과 자비를 나에게 구했겠니?.....”
.....아닙니다. 하나님!! .....
오네시보로와 그 가정은 그 후에 목숨의 위협과 핍박으로 힘들고 어려웠을 뿐 아니라 순교까지도 당했을 지 모릅니다.
그는 아마(정확한 것은 알수 없지만) 그 시대의 상황에서 엄청난 어려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게 긍휼하심을 구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에게 닥쳐올 상황을 알고 있었거나 또는 꼭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볼때 자기에게 너무도 친절하고 힘이 되었던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정에 닥쳐올 어려움을 알고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그리고 “원컨대, 원컨대” 로 그의 마음을 담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미리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곳으로 보내야 할 때의 심정이 묻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요청했던 ‘그 긍휼함’이 저에게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난 오네시보로가 당할 시대적 환경보다는 너무 좋은, 비교할 수 없는 감사함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딤후 1:16~18 절의 말씀 중에 바울이 오네시보로의 집에 구했던 긍휼이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 부딪쳤습니다.
내가 하는 기도제목은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였습니다. 목숨을 내어놓고 감옥에서 간구하는 바울의 마음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도 같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나도 너의 그 마음 다 알아”.....
딤후 1: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딤후 1:18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오늘 메일을 통하여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5년동안 개척교회를 섬기셨는데 지금 빚으로 인하여 쫒겨 나야 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부르짖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과 함께 그의 바람은 그 교회에서 부활절까지라도 드리고 문 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께 울며 메달렸을까..이런 생각들로 참 안타까웠습니다.
저도 이제 개척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분의 글속에서 그의 안타까움이 철철 묻어나는 듯 했습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고나 할까요.
저도 사실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이 기도 제목들 때문에 오늘은 너무 힘들었음을 고백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것 때문에 정말 답답함이 밀려 왔습니다. 저의 이 기도와 개척교회 목사님의 모습이 하나로 되면서 어찌나 힘들던지요.
고난 주간에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아랑곳없이 저가 진 십자가만 더 무겁게 느껴지니, 마치 제가 진 ‘고난주일의 십자가’라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지러 기도굴에 갔습니다. 기도하러간다기 보다 그냥 하소연하고 또 따저보고 싶어서, 그냥 답답해서 걸어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당하고 있는 기도제목들, 그 목사님이 당하시는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크고 무겁던지 기도도 되지않았습니다.
원망만 했습니다. 불평만 했습니다. 그 목사님을 소명으로 부르시고 개척하게 하셨으면 좀 잘되게(?)하셔야지요. 왜 문닫게 합니까? 영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개척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미리 말씀하셔야지요. 왜 2억의 빚으로 부활절도 못드리고 쫒겨 나게 합니까?
저도 개척하면 그렇게 하실랍니까? 저도 주님이 틀림없이 부르셨고 은혜로 인도하셨는데 나 만인가요?
저에게도 또 기도제목이 있잔아요. 왜 아무 말씀안하시고 침묵하십니까? 응답이 없나요? 손이 짧으신가요?..........
....“오네시보로 가정있잖니? 그 가정이 바울의 기도를 받고 그 후에 평안했겠니?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걱정도 없이 잘 먹고 잘 살았겠니?
바울을 잘 섬기고 시원케 했던 그와 그 가정이 평안하게 살다가 죽었겠니?
또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그렇게 살도록 긍휼과 자비를 나에게 구했겠니?.....”
.....아닙니다. 하나님!! .....
오네시보로와 그 가정은 그 후에 목숨의 위협과 핍박으로 힘들고 어려웠을 뿐 아니라 순교까지도 당했을 지 모릅니다.
그는 아마(정확한 것은 알수 없지만) 그 시대의 상황에서 엄청난 어려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게 긍휼하심을 구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에게 닥쳐올 상황을 알고 있었거나 또는 꼭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볼때 자기에게 너무도 친절하고 힘이 되었던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정에 닥쳐올 어려움을 알고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그리고 “원컨대, 원컨대” 로 그의 마음을 담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미리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곳으로 보내야 할 때의 심정이 묻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요청했던 ‘그 긍휼함’이 저에게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난 오네시보로가 당할 시대적 환경보다는 너무 좋은, 비교할 수 없는 감사함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딤후 1:16~18 절의 말씀 중에 바울이 오네시보로의 집에 구했던 긍휼이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 부딪쳤습니다.
내가 하는 기도제목은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였습니다. 목숨을 내어놓고 감옥에서 간구하는 바울의 마음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도 같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나도 너의 그 마음 다 알아”.....
딤후 1: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딤후 1:18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